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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 전시 내용 보기 

'호주제'란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구성원들의 출생·혼인·사망 등의 신분변동을 기록하는 것으로, 민법 제4편(친족편)에 의한 제도였다. 우리나라의 호주제는 부계혈통을 바탕으로 하여 호주를 기준으로 '가(家)' 단위로 호적(戶籍)이 편제되는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도입되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 남아있던 호주제는 그동안 '남성 우선적인 호주승계순위, 호적편제, 성씨제도'와 같은 핵심적인 여성차별조항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또한 부계혈통을 바탕으로 하였기 때문에 가족 내 주종관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게다가 이혼·재혼가구 등의 증가에 따른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77년, 1990년, 2002년에 부분적 개정이 이루어졌고, 2005년에 드디어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민법 개정안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

가족법 개정 운동 

가족법 개정 운동 

한국 여성 운동의 가장 큰 맥을 형성해 온 운동은 가족법 개정 운동이다. 가족법 개정 문제가 제기된 것은 민법에서 여성의 차별적인 지위가 헌법의 남녀평등과 배치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법 개정을 둘러싼 여성 운동은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봉건적 가족문화 해체를 위한 출발
해방 이후 헌법에 의해 보장된 남녀평등 원칙과 남녀동권은 주어진 것이었다. 정부수립후 10년에 걸친 민법 제정, 특히 가족법 조항을 둘러싼 논란의 배경에는 당시 사회의 평등권에 대한 인식의 척박함을 보여주었다. 최초의 가족법은 남녀평등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관습존중론'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관습과 미풍양속을 지킨다는 뜻에서 남성 우위의 불평등한 법률 조항을 존속시켜, 후에 전개된 가족법 개정 운동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1957년 4월에 여성계는 국회공청회에 참가하여 헌법 이념대로 남녀평등을 보장하는 입법을 주장하였다. 이에 ‘유도회’는 종래 유교 도덕관에 입각하여 한국의 미풍양속을 유지해야한다는 명분하에 가족법상 여성의 지위 향상은 가정의 혼란을 야기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1960년부터 시행된 민법은 자녀는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도록 하는 부성주의 원칙, 혼인과 더불어 여성을 남성 가족에 편입시키는 호주제 및 호적제와 같은 근본적인 남녀불평등 조항이 남아있지만 ‘처’의 지위 향상을 보여줬다. 부부별산제를 인정하여 처의 특유재산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계모자관계를 인정하고 적모서자를 인정하는 법을 여전히 남겨두었다.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
친족상속법상 개정을 요하는 조항과 가정 재판소 설치를 주요 골자로 하는 제2기 가족법 개정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2년에 이루어진 가족법 개정에 소가족 제도를 법적으로 인정하면서 대가족 제도의 남계 혈통을 강화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데 일조한 ‘법정분가제도’와 ‘강제분가제도’가 설치되었다.

1970년대에 국내외적으로 여성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모든 여성단체가 연대하여 가족법 개정 운동에 동참하였다. 1974년 여성단체협의회는 유엔이 선포한 1975년의 세계 여성의 해의 준비작업으로 전국대회주제를 ‘세계여성의 해와 한국여성의 현실’로 삼고 정부의 정책적인 관심을 촉구하였다. 1970년대 이후 본격적인 가족법 개정을 위한 연구에 착수하여 국회에 진정서를 내고 여성 국회의원 이숙정을 비롯하여 가족법률상담소장 이태영 등 많은 움직임이 있었지만 유림 등 사회 보수 계층의 강력한 반대 운동으로 수차례에 이뤄진 가족법 개정은 미미한 개정에 그쳤다.

한국의 가족법 관련 입법 과정은 가부장적 가족 제도의 청산을 주장하는 여성 운동 측과, 이를 유지하려는 유림세력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각각의 입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정치적 산물로 가족법이 개정되어 왔다. 이와 같이 호주제를 둘러싼 논쟁이 진행되는 배경에는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개인주의적 평등 이념의 상반되는 원리가 가족법에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가족법 개정 운동이 실질적인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여성 운동은 또 다른 차원으로 접어들었다. 1970년대까지는 여성 단체들이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가족법개정운동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어, 1984년 7월에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주관으로 41개 여성단체 대표의 발기로 ‘가족법개정을 위한 여성단체연합’(회장 이태영)을 결성, 가족법 개정 촉진대회를 개최한 이후 서명운동 및 계몽운동을 계속하였다. 특히 1983년 5월, 정부가 서명한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Convention on the Elimination of All Forms of Discrimination against Women)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 있어 본 협약을 위반하는 성차별적 가족법 규정의 개정 압력을 가하기에 좋은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1985년 총선을 앞두고 또다시 여야당 모두 소극적인 태도로 일변, 개정은 무산되었다. 1986년 11월 개정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하였으나 그해 12월 1일 5,000여 명의 유림이 국회 정문 앞에서 ‘가족법 개정 결사반대시위’를 벌였다. 당시의 가장 핵심적인 개정 의제는 호주제와 동성동본금혼규정의 폐지에 있었고 유림은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 노력을 기울였다. 이 와중에 법무부 장관이나 국무총리 등 고위 관료들은 가족법 개정은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입장을 반복함으로써 사실상 유림과 다르지 않는 신조를 드러냈다.

1987년 한국사회에 들불처럼 타오른 광범위한 민주화의 요청 속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진보적인 국회가 구성되었다. 그 해 12월에 「혼인에 관한 특례법」이라는 한시적 특별법이 또다시 국회를 통과하였다. 1988년 11월 여성단체의 개정안은 153명 국회의원의 제안으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또한 여성연합회는 5만 1,630명의 찬성자 서명을 첨부한 청원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는 1989년 2월부터 개정안의 심의를 시작하였고, 여성단체 개정안을 반영하여 국회 법사위가 마련한 수정안이 1989년 12월 19일 제13대 정기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1991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1989년 개정 이후 1997년은 가족법 개정사에서 또 다른 중요한 해이다. 그 해 3월 8일 여성의 날에 ‘부모성 같이 쓰기 운동’이 제안되어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범사회적 각성이 일어났고, 7월 16일에는 헌법재판소에서 ‘동성동본금혼’ 규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졌다. 이 시기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의 모임(호폐모)’과 같이 평범한 시민들이 주체가 된 모임이 결성되었고, 1999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한의사협회 등이 ‘호폐모’와 광범위한 연대를 이루게 된다. 이 단체들은 당시 널리 퍼지기 시작한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여기서 호주제도에 따른 구체적 피해 사례가 집적되었다. 이혼의 증가 및 재혼의 증가 등에 따른 여성과 그 자녀들의 피해사례, 가족의 소규모화 속에서 ‘아들출산’의 압력 하에 놓인 여성의 고통이 대중의 의식을 일깨운 것이다.

2000년에 들어서 호주제폐지 청원, 호주제 위헌소송 전개, 114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호주제폐지를 위한 시민연대' 결성 등 여성단체뿐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합쳐 호주제폐지를 위한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위헌소송이라는 새로운 운동방식과 호주제도로 인한 피해자들의 생생한 사례는 호주제폐지의 당위성을 여론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평등을 위한 진일보, 호주제 철폐를 위한 노력
가족법개정운동은 가정과 사회에서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확보하고 여성의 인간화를 구현하는 운동이다. 남아선호사상, 부계혈통 중심의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의식과 관습, 관행속에서 여성의 인권이 유린되어 왔던 점을 시정하고 궁극적으로 21세기에 새롭게 정착되어야 할 양성평등한 가족구조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즉 호주제가 폐지되면서 가족관계가 평등해진다면 그 가운데 민주적인 시민의식이 성장하고 수평적인 소통구조 속에서 개인과 사회의 삶의 질은 자연스럽게 향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야가 민법개정안에 합의한 사항은 크게 호주제폐지로 집약될 수 있지만, 이와 더불어 여러 차원에서 의미 있는 변화가 뒤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생계를 함께 하면 처의 부모도 민법상 가족으로 인정되고, 또한 부모가 합의할 경우 자녀가 어머니성을 따를 수도 있으며, 동성동본 결혼도 8촌이내만 금지하는 등의 변화가 그것이다. 또한 양자를 친자로 인정하여 계부의 성을 따를 수 있도록 하였고, 기존의 부계혈족 중심에서 양계혈족으로 범위를 확대한 것 역시 큰 변화였다. 이는 양성평등 원칙과 개인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민주화된 사회의 흐름을 반영하여, 그동안 법적인 약자이자 희생자였던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는 차원의 함의를 갖는 것이다. 즉 호주제로 인해 법적, 사회적으로 부차적인 존재에 머물렀던 어머니, 아내, 딸인 여성들의 인권이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거의 회복되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또한 추상적인 개념의 '가'를 전제로 한 분가, 폐가, 복적 등과 같은 복잡한 관련 규정이 폐지되면서 현실에 부합한 적정 범위의 가족사항이 기록, 관리되는 보다 합리적인 신분등록제를 마련하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가족제도는 법과 정책의 변화만으로 쉽게 변화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가족법개정안은 남성중심의 수직적인 가족관계를 폐지하고 이혼 재혼가정에 대한 차별적인 요소를 개선함에 따라 양성이 평등한 보다 민주화된 가족구조와 가정 내의 여성지위를 향상시키는 차원에서 패러다임의 전환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광복 이후 지금까지 전개해 왔던 대표적인 여성운동으로서 가족법개정운동은 2005년 그 동안 여성의 억압된 삶을 유지시켜왔던 호주제를 철폐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중요한 한 획을 그었다.